한승헌 변호사 “연극 ‘보도지침’ 배우들은 ‘알파고’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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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언 전 신문발전위원회 사무총장, 한승헌 전 감사원장, 김종배 시사평론가(왼쪽부터) © News1 송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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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보도지침’ 연습실 참관 현장 © News1 송원영 기자


(서울=뉴스1) 박정환 기자 = "배우들이 (1980년대 군부독재 당시) ‘보도지침’ 사건을 맡은 판사, 검사보다도 더 진짜 같아요. 저는 오늘 연극 연습장면을 보고 완전히 압도당했습니다. 이세돌보다 바둑을 잘 두는 ‘알파고’를 만난 것 같은 기분입니다."

‘민주화 운동의 원로’ 중 한 사람인 한승헌 변호사(82)는 1980년대 군부독재 정권의 언론통제를 다룬 연극 ‘보도지침’ 연습을 참관한 뒤 "당시 재판부는 재판을 제대로 못 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한 변호사를 비롯해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62), 김종배 시사평론가(50)가 지난 17일 서울 대학로 서울문화재단 연습실을 방문해 당시 상황을 배우들에게 설명하고 관람 소감을 밝혔다.

이들은 ‘보도지침’ 재판 과정에 관련된 실존인물들이다. ‘보도지침’은 과거 제5공화국 안전기획부와 문화공보부가 언론에 은밀히 하달해 보도내용을 통제하던 지시 사항이다. 1985년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가 월간지 ‘말’에 이 문건을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보도지침은 민주화 운동, 대외 관계, 여론에 관한 기사 작성 시 어떤 내용으로 어느 면 어느 위치에 몇 단으로 싣고 제목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등의 세부사항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언론사의 보도지침 이행률은 평균 77.8%에 달했다.

동명 연극 ‘보도지침’에는 실존인물을 연상케 하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정의로운 기자 김주혁(송용진·김준원)과 월간 ‘독백’ 발행인 김정배(김대현·안재영), 변호사 황승욱(이명행·김주완) 등이 등장한다. 다만 등장인물 간의 관계는 연극적 완성도를 위해 현실과 다르게 각색됐다.

한 변호사는 "연극은 실제 사건을 압축해야 하므로 현실과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며 "변호사가 나 혼자 나와서 민망한데 실제 재판에는 인권변호사 10여 명이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 가운데 내 군번이 제일 빨라서 이렇게 각색한 것 같다"면서 웃었다.

보도지침 문건을 폭로한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는 "회사로 출근하던 길에 검은색 승용차에서 내린 형사들에게 붙잡혀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던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며 "20여일 동안 밤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지루한 심문과 폭력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가가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법률은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누설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국가 모독죄 등이었다"고 덧붙였다.

한 변호사는 배우들에게 실제 재판과정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그는 "보도지침 문건에는 ‘김대중 씨에 대한 기사에서 사진을 쓰지 말 것’이란 대목이 있다"며 "법정에서 내가 ‘김대중 씨의 얼굴도 국가기밀인가’라고 한마디 했다"고 말했다.

그는 1심 재판에서 변호인단이 증인으로 신청한 24명이 채택됐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취소됐던 일화도 들려줬다. 증인 24명은 정부의 홍보조정실장, 정책실장, 언론사 정치부장, 사회부장 등 보도지침 문건 관련자들이었다. 한 변호사는 "재판부(단독 판사)가 놀랍게도 우리가 신청한 증인 24명 전원을 채택했다"며 "아니나 다를까 그다음 기일에 판사가 증인 24명 채택을 모두 취소해서 우리 변호인단을 놀라게 하였다"고도 했다.

김 기자는 실제 사건을 다루더라도 창작은 예술가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극 ‘보도지침’이 실제 사건을 다루지만, 우리 시대에 맞게 상황설정을 바꾸는 것은 전적으로 예술인의 영역"이라며 "내가 ‘바보’로 나와도 상관없으니 더 많은 관객이 봤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보도지침 사건은 종결된 사건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그는 연극제작진에게 "지난해 메르스 사태에서 ‘손만 씻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식의 보도가 쏟아져 나온 것처럼 은밀하게 유연하게 저강도의 언론 통제가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메르스 사태나 세월호처럼 관객들이 알만한 사건을 연극 안에 추가한다면 언론이 지켜야 할 보도의 자유가 무엇인지 쉽게 전달될 것"이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연극 ‘보도지침’은 오는 26일부터 6월19일까지 서울 대학로 수현재씨어터에서 공연한다. 프로듀서 이성모, 극작 오세혁, 연출 변정주, 조연출 박준영. 가격 5만원. 문의 (02)2644-4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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