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인터뷰①] “인생의 터닝포인트”…이제훈이 끌어안은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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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시그널’ ‘내일 그대와’ 영화 ‘건축학개론’ 등 대중이 흔히 바라보던 깔끔하고 댄디한 이미지의 이제훈은 이준익의 영화 속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남루하고 부스스한 박열만이 남았을 뿐.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지워내며 파격적인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영화 ‘파수꾼’과 ‘파파로티’의 삐딱함을 넘어선 수준으로,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이 스크린에서 날아다닌다.

이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박열’은 1923년 도쿄를 배경으로 해 6천 명의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조선 최고 불량 청년 박열(이제훈 분)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후미코(최희서 분)의 실화를 담은 영화로, 권력 혹은 정부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아나키즘의 시작을 알리며 독립을 위한 조선인들의 저항과 뜨거운 열망을 담아냈다.

극중 이제훈은 일본 제국의 한복판에서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남루한 생활을 하지만 조선인을 조롱하는 일본인에게는 칼을 휘두르며 조선 최고의 불량 청년, 박열로 분했다. 간토대지진 혼란을 틈타 자행된 무차별적인 조선인 학살 문제를 무마시킬 희생양으로 지목된 박열은 오히려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일본인들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그들이 원하는 영웅이 되기로 결심한다.

‘틀림’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일본을 향해 조롱하고 촌철살인과 함께 저항하는 그의 모습은 일말의 카타르시스까지 선물한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뿌리 깊게 내린 그의 내면 덕에 꾀죄죄한 몰골은 어두울 수 있어도 박열의 전신은 환한 빛,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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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된 이후의 모습들을 봤을 때 오히려 박열이라는 인물을 몰랐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컸어요. 박열이 끝까지 살아남아서 너희들이 저지른 만행을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품었던 시간이 무려 22년 2개월이에요. 해방이 되고 출소한 후 혼란스러운 나라를 건국하는 데에 있어서 일조하셨고 알려진대로 일본에 있는 윤봉길 의사나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가지고 효창공원에 묻히게 한 장본인이죠. 나라의 독립을 희망했던 사람들이 많고, 그 분들을 잘 알아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금 더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야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데에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어 그는 “지금은 자유에 대한 의지나 개성을 표출하는 것 혹은 평등할 권리는 당연한 것인데 그 당시에는 그게 다 차단되고 거세됐죠. 저도 아마 견뎌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도 그 시대를 보고 튀어나갔을 것 같더라고요. 그 지점에서 박열과 저라는 사람의 접점을 찾아냈어요. 물론 표현하는 측면에 있어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죠. 혹시라도 왜곡이 되거나 영웅으로 미화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부족하면 당연히 안 되고 넘치지도 않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최대한 제 모습을 제3자 입장에서 관찰하려고 했어요”라며 연신 진중한 모습을 내비쳤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연출력으로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겸비한 이준익 감독과 이제훈의 만남은 캐스팅 소식과 동시에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특히 알려진 인물이 아닌 숨겨진 의인을 영화화한다는 이야기에 그들이 펼쳐낼 신선함과 장엄함에 눈길이 쏠리기도. 이제훈 역시 이준익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에 시나리오를 모두 읽기도 전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과 함께 일하셨던 분들에게 감독님에 대해 많이 여쭤봤어요. 다들 같이 있으면 너무 즐겁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도 작업하고 나서 왜 많은 분들이 감독님과 또 함께 하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됐어요. 그리고 감독님은 테이크를 많이 가지 않고 거의 첫 테이크에 결정을 내리시는 스타일이라고 하셔서 저 역시 촬영할 때 첫 테이크에 담겨진 행동들이나 감정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촬영에 임했어요. 여타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집중도가 강했었고 그 순간을 맞닥뜨리는 과정에 있어서 뭔가 계속 노심초사한 부분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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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박열’에게 다른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주는 분위기다. 보통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들은 잔인했던 비극사를 오롯이 담기 위해 차갑고 침울한 결을 스크린 위에 담는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다른 길을 택했다. 영화 내내 장엄하고 슬픈 가락이 흐르는 대신 밝디 밝은 멜로디가 흐를뿐더러 등장인물 모두 기가 꺾이는 모습 따위 없이 조롱과 풍자를 일삼으며 능글맞음을 그대로 안고 간다.

“제가 감옥 안에서 다테마스 예비판사에게 심문을 받잖아요.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표정을 짓는 게 저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어요. 그 모습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재밌을지는 몰랐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저는 나름 진지하고 심각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야 이건 코미디야’라고 하셔서 의문이 있었죠.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어요. 사실 중간에 펼쳐지는 과정들이나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의 생각과 사상을 드러내는 부분이 지루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캐릭터성이 짙은 모습과 감독님 특유의 해학, 익살스러움, 조소가 담겨서 재미있어진 것 같아요.”

이제훈의 능청스러움을 더욱 부각시킨 건 그의 자유분방한 외형 덕도 있다. 정리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 덥수룩한 수염, 질질 끌려 다니는 바짓단 등은 이제껏 말끔한 면모를 유지해오던 이제훈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던, 낯선 외형적 변화다. 실제로 ‘박열’ 첫 포스터 공개 당시에도 대중들은 그의 파격적 변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현장에서 남루하게 있었어요. 보통 현장에서도 관리 받거나 꾸미고 그런 경우가 있는데 저는 워낙 더럽고 지저분하게 있었기 때문에 방치됐죠.(웃음) 저도 이런 외형적 인물을 언제 또 경험할 수 있을까 상상이 안됐어요. 이런 모습을 한 캐릭터를 했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의의가 있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포스터 나왔을 때 사람들 반응이 그 정도로 뜨거울 지 생각도 못했거든요. 확실히 세긴 세구나 싶었어요. 배우로서 이탈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욕구가 있었는데 이 작품으로 해소가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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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제훈을 힘들게 짓눌렀던 일은 바로 외국어인 일본어를 소화하는 일.. 실제로 꿈에서까지 등장해 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담감을 느꼈던 그에게 일본어는 가장 먼저 해소해야할 숙제였다. 대사의 빠르기와 디테일한 분석까지, 동료 일본 배우들에게 일일이 녹음을 요청하며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천신만고 끝에 일궈낸 노력으로 그는, 네이티브에 가까운 일본어를 구사해냈다.

“저는 원래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밖에 못하는 사람이에요.(웃음) 시나리오를 받고 이준익 감독님과 함께 한다는 생각에 그저 너무 좋았는데 시나리오를 끝까지 읽었을 때는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한국어로 감정을 담아 대사를 뱉는 것도 벅찬데 웬 외계어가 적혀있었어요. 엄청난 부담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같이 출연하는 배우 분들께 일본어 대사에 문장과 문단, 단어 대사를 읊는 빠르기의 속도 녹음을 부탁을 드렸죠. 감사하게도 제 부탁을 들어주시고 녹음을 해주셔서 촬영 내내 끼고 살았어요. 계속 아침 점심 저녁까지 매번 읊조리고 다니고 같이 있는 스태프들한테 대사를 치니까 처음에는 ‘이 친구 열심히 준비한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노이로제 걸리겠다고 그만 하라고 하시던데요? 지금은 쿡 찌르면 기계적으로 나올 정도에요.”
/9009055_star@fnnews.com fn스타 이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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