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인터뷰①] “철저한 고증 아래”…이준익이 귀 기울인 박열이란 잔물결

0

201706261752018508.jpg

이준익 감독의 손에서 또다시 대단한 수작이 탄생했다. 그 어느 때보다 파격적이다. ‘왕의 남자’, ‘소원’, ‘사도’, ‘동주’, ‘라디오스타’, ‘황산벌’ 등 한 시대에 국한하지 않고 자유로이 넘나들며 장르의 깊이와 다양성을 드넓게 파헤친 이준익이 조선 최고 불량 청년 ‘박열’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비극적인 가족사를 재조명했던 ‘사도’, 시인 윤동주와 송몽규 열사의 가슴 시린 이야기를 담담하게 뭉쳐놓은 ‘동주’, 가랑이 속 권력을 힘껏 조롱한 ‘왕의 남자’까지. 이준익이 그려낸 역사는 한이 서린 울분, 뜨거운 열망, 옳음을 향한 투쟁 그 모든 것들이 응집되어 한 스크린 안에 온전히 담겨있었다.

영화 ‘아나키스트’(2000)을 제작 준비 중이던 이준익 감독은 자료 조사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투사 가운데 박열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된다. 고등학생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을 목도한 후 일본 제국주의에 거세게 투쟁했던 한 청년에게 매료되었고 그의 삶과 가치관을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알리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20년을 공들인 끝에 이준익은 영화 ‘박열’을 통해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의 신념을 불꽃 마냥 펼쳐냈다. 대신, 극적인 과장과 정형화된 시대극 프레임을 완전히 넘어서서 ‘90% 고증’이라는 자신감 있는 정공법을 택했다.

박열을 향한 이준익 감독의 애정도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인터뷰 시작하기에 앞서 연신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을 읊으며 관객들이 이 영화의 본질을 꿰뚫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의 영혼은 이미 박열에게 오롯이 잠식되어있었다.

201706261752017265.jpg


▲ 오프닝부터 강렬하다. 최희서의 목소리로 ‘개새끼’ 시를 읽고 들어가는데, 관객들이 박열이라는 인물에 더 쉽게 이입할 수 있게끔 설치해놓은 것인가.

“그런 거죠. 영화에서는 박열이라는 캐릭터의 전사를 안 보여주잖아요. 박열의 삶을 구구절절 다 보여주려면 엄청 길어져요. 그 시부터 들어가면 될 것 같아서 자신 있게 시로 시작했죠.”

▲ 일반적으로 역사를 재구성한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정도로 관객에게 고지한다. 그런데 ‘박열’은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고증에 입각했다고 단언하고 들어가더라.

“일본 관객 때문에요. 박열이 주인공이지만 일본 사람들이 보게 되면 박열이 주인공이 아니라 가네코 후미코가 주인공일 거예요. 우리는 이제훈을 알지만 일본 사람들이 이제훈 씨를 얼마나 알겠어요. 한국 사람들도 박열을 많이 모르는데. 대신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의 10대 여성 중 한 명이라 일본 사람들이 정말 잘 알아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무조건 실화임을 알려야했어요.”

▲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신념에 의한 두 사람의 로맨스가 펼쳐지지만 단번에 서로에게 매료되고 동거를 제안하는 건, 어떻게 보면 감정 전개가 급박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현대적인 남녀 관계 관점으로 보면 굉장히 동의하기 힘든 신이죠. 그런데 그게 고증이에요. 박열과 후미코에게만 있는 특별한 모멘트죠. 두 사람은 사상이 같았어요. 보통 사랑을 고백할 때는 마음이 통하는 게 중요하지만 두 사람은 그것보다 생각이 통하는 게 더 중요했던 거죠. 가네코 후미코는 마음으로 통했다기 보다 ‘개새끼’라는 시를 보고 그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일치함을 느껴서 동거 서약을 썼던 거고, 동지로서 동거를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운동 활동 기간 중에는 여자로 보지 않는다’ ‘한 사람이라도 타락하면 동거를 그만 둔다’ 등의 내용이 서약 안에 들어있죠. 요즘 사람들은 생각보다 사랑의 크기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박열과 후미코는 그 반대의 경우에요. 뜻이 맞으면 같이 죽을 수 있거든요.”

▲ 보통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는 한-일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달리 ‘박열’은 일본과 서양의 관계도 은연중에 함께 묘사했다. 또한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일본인들의 모습도 그려지는데.

“사실은 그게 맞아요. 식민지 이후 70년 간 우리는 프레임에 갇혀 일제강점기를 보는 협소한 시선을 가졌기에 이 영화가 생경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일본 제국주의의 명분은 21세기 초반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식민지 개척을 하면서 세워놓은 제국주의 매뉴얼을 똑같이 따라하는 것에 있어요. 그러면서 국제사회에서 자신들도 동등한 지위를 얻으려는 국가적인 어젠더가 있었어요. 사실 도쿄인데 박열이란 인물 하나 죽이면 그만이죠. 그런데 왜 사법체계의 공정한 절차를 따르며 대법원에 세우려했을까요? 명분이 필요했거든요. 6000명이나 조선인들을 학살했는데 명분이 없으니 서구 유럽 사회에게 할 말이 없는 거죠. 마냥 죽이면 ‘너네가 문명국이야? 제국주의 할 자격 없어’라고 할 테니까요.”

201706261752020641.jpg


▲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인 박열을 보면 ‘왕의 남자’ 속 장생이 떠오른다.

“그게 아나키스트의 기질 중 하나에요. ‘개새끼’라는 시를 쓴 박열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기 조롱, 자기 비하가 들어가요. ‘그래 나 개새끼야’라고 자신을 비하하면서 상대도 함께 조롱하죠. 그것이 박열 캐릭터를 만들어낸 단서에요. 일부러 재밌으라고 만들면 과한 표현일 수도 있는데 실제로 시를 쓴 시인은 자기를 개새끼로 비유하는 자기 비하 수식을 썼죠. 그리고 그 방식대로 당한 건 갚아주면서 사는 거예요.”

▲ 가네코 후미코를 강렬한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라고 칭했다. 동일한 맥락으로 보는가.

“동일해요. 아나키스트는 권력에 저항하잖아요. 그런데 권력에 저항한 다음에 자신들이 권력을 잡을 생각이 전혀 없어요.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죠. 남성 권력에 저항하지만 여성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니죠. 동물 단체, 환경 운동가들도 새 권력을 잡기 위해 저항하는 건 아니니까요. 단지 잘못된 권력에 저항할 뿐이에요. 촛불 집회도 마찬가지에요. 촛불만 들었을 뿐 아무것도 안했는데 권력자들은 무서워해요. 그리고 세상을 바꾸죠.”
/9009055_star@fnnews.com fn스타 이예은 기자 사진 이승훈 기자

Facebook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