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부수고 단순하게 경고한다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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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도시 전체를 찢어발기고 미국을, 나아가는 백악관과 자유의 여신상일지라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대표작이다. <유니버설 솔져>부터 <스타게이트>와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패트리어트 – 늪속의 여우>, <2012>를 거쳐 <미드웨이>에 이르는 화려한 필모그래피는 에머리히를 세계적인 유명 감독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주요 도시와 공권력, 때로는 국가의 상징물까지도 거침없이 부숴버리고 돌아서서 호탕하게 웃어제끼는 그 특유의 스타일은 많은 안티와 팬을 동시에 양산했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방식으로 세태를 풍자하고 시대착오적이라며 무시당하거나 쉬이 잊혀지는 것들에 거리낌 없이 애정을 드러내는 건 그의 영화가 지닌 또 다른 매력이다.

<투모로우>는 에머리히의 장점이 잘 녹아든 대형 재난영화다.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으로 미국 뿐 아니라 북반구 전체가 얼어붙는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기대를 모았다. <프리퀀시>의 데니스 퀘이드와 촉망받는 젊은 배우 제이크 질렌할을 내세워 흥행까지 성공했다.

그레고리 호블릿의 <프리퀀시>에서 3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아들을 지키는 아버지를 연기한 데니스 퀘이드는 이 영화에서도 뉴욕의 공립도서관에 고립된 아들을 구하려 얼어붙은 뉴욕을 가로지르는 기상학자를 연기했다.

영화는 뉴욕의 공립도서관에 고립돼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아들일행과 뉴욕에 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여정을 떠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교차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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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부수고 단순하게 경고하다

<투모로우>의 가장 큰 볼거리는 거대한 폭풍과 기온급감이라는 대재앙에 직면해 무력하게 파괴되는 문명의 모습이다. 미국의 가장 유명한 도시인 LA와 뉴욕의 상징물이 회오리바람에 휩쓸려나가고 눈과 얼음에 파묻히는 모습은 에머리히의 영화가 아니고서야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대부분의 재난영화가 그렇듯 당해낼 수 없는 재앙과 마주한 사람들의 태도 역시 안정적인 구성과 캐릭터 위에서 설득력있게 그려진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특유의 경고와 풍자, 유머도 영화를 풍부하게 만든다.

인상적인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아버지가 뉴욕에 가 있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얼어붙은 땅을 가로지르던 모습, 다른 하나는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구해기 위해 도서관 밖으로 향했던 장면이다.

퀴즈대회에 참가하러 뉴욕에 가있던 아들 샘과 그를 구하러 목숨을 건 여정을 떠나는 아버지. 영화 중반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지고 바닷물이 도시로 흘러드는 와중에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을 건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성급하게 건물 밖으로 나오지 말고 자신이 구하러 갈 때까지 안에서 기다리라고. 그리고서 그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뉴욕으로 향해 마침내 아들을 구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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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답을 안다… 그래서 괴롭다

세월호 침몰참사가 발생한지 6년하고도 6개월이 흘렀다. 우리는 여전히 세월호 침몰참사와 관련한 진실 상당부분을 명백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사건 직후 바다 밑에 잠긴 아이들을 두고 많은 어른들이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공권력과 언론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가운데 희망은 절망으로 변해갔다. 더없이 허망하고 무력한 순간이었다.

영화 속 샘과 단원고 학생들은 많은 점에서 비슷했다. 스스로 위험을 알렸고 가만히 있으라는 통제에 따랐으며 어른들이 자신들을 구하러 올 것이라 확신했다. 빠르게 얼어붙던 도시에서, 침몰하던 배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런데 어째서 샘은 살고 세월호 탑승객들은 그렇지 못했을까.

과연 지금은 달라졌을까.

긁힌 상처가 감염돼 고열에 시달리는 로라(에미 로섬 분)에게 파괴되고 병들어 기상이변을 일으키는 지구를 본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도서관 밖으로 나아가는 샘과 친구들이 항생제를 구해와 로라를 살려낼 수 있는지는 영화는 물론 에머리히가 바라보는 지구의 운명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영화에서 로라는 곧 상처입고 고통스러워 하는 지구다. 그럼에 로라를 죽이는 건 곧 지구를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로라를 살리기 위한 샘의 용기있는 행동이 지구를 살리기 위해 애쓰던 그의 아버지의 노력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흔히 에머리히는 돈을 퍼부어 규모만 큰 재난영화를 찍는 감독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 세 개를 소개하며 이번 ‘영화가난다’를 갈무리한다.

#1

"혹시 이걸로도 발전기가 돌아갈까요?"

사이먼이 꽂혀진 책들 뒤에 숨겨진 스카치를 꺼내며 말한다.

"미쳤나? 그건 12년 묵은 스카치야."

랩슨 교수가 사이먼의 말에 대꾸하며 역시 책 뒤에서 잔 세 개를 써낸다. 모두 웃고 다같이 건배를 하며 사이먼이 말한다.

"to England. 잉글랜드를 위해."

랩슨 교수가 이어 말한다.

"to mankind. 인류를 위해."

고메즈가 화답한다.

"to Manchester United.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위해."

#2

벽난로에서 태울 책을 모으며 니체의 책을 뽑아든 여자에게서 책을 빼앗으며,

"프리드리히 니체는 안 돼. 19세기 최고의 철학자라고."

니체에 대한 투닥거리는 말다툼이 이어진다. 그때 아래에서,

"잠깐만요. 여기에 세법 관련한 책 잔뜩 있어요."

#3

여자가 남자 사서에게 묻는다.

"무슨 책이죠?"

"희귀서적실에 있던 구텐베르크 성경."

"신이 구해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난 신을 안 믿어."

"그런데 왜 책을 껴안고 있죠?"

"지키려고."

침묵.

"이 성경은 최초의 인쇄본이야. 이 책으로 이성의 시대가 열렸지. 인류 최대의 발명품은 문자야."

여자가 ‘훗’하고 웃는다.

"비웃어도 좋아. 하지만 문명이 끝나도 이 책 하나만은 남겨놓고 싶어."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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