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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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인구 900만의 스웨덴에서 11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2014년 한국에서 동명 영화로 개봉했다. 스웨덴 출신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북유럽 영화로선 이례적으로 24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감독은 배우이기도 한 플렉스 할그렌이다. 그가 100세 노인 알란 칼슨(로버트 구스타프슨 분)을 앞세워 20세기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가로지르는 코미디를 영상으로 옮겼다. 소설의 기본적인 얼개를 그대로 따르는 영화는 주인공 알란이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와 소련의 스탈린, 미국의 트루먼과 레이건 대통령,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 유명한 인물들과 만나며 겪게 되는 일들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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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소동극과 어우러진 세기적 사건들

영화는 사랑하는 고양이의 복수를 위해 여우를 살해한 죄로 요양원에 들어간 100세 할아버지 알란이 요양원 창문을 넘어 도망치면서 겪는 일련의 이야기를 그린다. 요양원을 나선 알란은 우연치 않은 계기로 폭주족으로부터 거액의 돈이 든 가방을 훔치게 되는데, 그 돈을 되찾으려는 폭주족들과 벌이는 한 편의 소동극이 영화의 주된 얼개다.

흥미로운 사실은 알란이 폭주족을 피해 도망치는 현재시점에서 승부를 걸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중간중간 알란의 독백과 함께 회상형식으로 그의 과거를 그려내는데,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승부수가 있다.

어린 시절 폭약을 가지고 놀다 우연히 사람을 죽이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일, 그곳에서 인종주의적 의사에게 단종수술을 받은 일, 무기공장에서 만난 친구를 따라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그 곳에서 프랑코와 친분을 맺은 일,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핵폭탄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소련의 스탈린과도 만났으며 러시아의 정치범수용소에서 노역을 하다 CIA와 KGB의 이중간첩으로 활약하는 믿기 힘든 과거가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그야말로 전세계를 종횡무진하며 20세기의 굵직굵직한 사건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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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자고?

주목할 건 알란이 어떤 이념이나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알란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별다른 생각없이 순간을 살아가는데, 영화 역시 ‘인생은 흘러가는 대로 살면 그 뿐’이란 주제의식을 관객에게 시종일관 당부한다.

알란은 100세에 이르는 자신의 전 인생을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의 인생은 늘 잘 풀려왔던 것이다. 감독은 알란이 평생에 걸쳐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희화화하며,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기까지 한다.

콘돔 사용의 필요성을 주장한 아버지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동료의 비극적인 최후,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와 양국 정보부 요원의 어리석은 모습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모든 진지함을 거리낌없이 희화화한다. 영화는 심지어 소련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을 위해 노력하던 알란 자신마저 희화화한다. 그는 러닝타임 가운데 오직 수용소에서만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일을 포기하자마자 목적을 이루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마주한다. ‘벌어질 일은 어찌해도 벌어지니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영화의 주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100세 노인이 된 알란이 만나는 현재시점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십 수년 동안 공부를 했으면서도 자신의 적성을 알지 못하는 나이든 대학생, 구닐라(미아 스케링거 분)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전 애인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낼 정도다. 영화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갔던 알란의 태도를 이들과 대비시켜 생각없이 순간에 충실한 삶이 더 나은 삶의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영화의 가장 의미심장한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 그야말로 한 세기를 거침없이 살아온 알란의 모습은 매우 유쾌하고 멋스럽게 그려지지만 사실 그는 얼마든지 불행하고 실패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특별한 태생도 이렇다 할 재주도 없고, 삶에 아무런 목적성도 없었던 알란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끈 건 전적으로 우연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연히 그의 인생이 다른 방식으로 풀렸더라면 삶에 대한 방향성과 가치관이 전혀 없었던 알란의 삶은 얼마든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알란의 삶은 이미 많은 문제를 낳기도 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어쩌면 무고했을 여우를 죽인 100세 노인 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식료품점 주인을 폭사시키고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질 원자폭탄 제조에 공헌하며 미국과 소련 정보부 요원들의 무의미한 희생을 불러온다.

하지만 영화는 이 모두를 그저 유쾌하고 우스꽝스럽게만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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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이 다른 블랙코미디

영화의 표현방식은 상당히 흥미롭고 미묘하다. 감독은 알란과 함께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친구가 죽는 장면을 노골적으로 로버트 카파의 저 유명한 작품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처럼 연출한다.

뿐만 아니다. 인종주의적 의사가 단종수술을 하는 장면, 프랑코의 입에서 파시즘의 절멸을 기원하던 친구의 정신을 기리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연출한다. 프랑코를 비난하는 스탈린의 모습을 통해 스페인의 파시스트와 소련의 독재자를 영리하게 대치시킨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자고 이야기하는 코미디 영화에서 이와 같은 장면들은 어째서 필요했던 것일까.

이쯤되면 영화는 ‘고민하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살라’는 코미디가 아니다. 가치관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삶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지난 시대의 온갖 부조리한 것들을 풍자하는 일종의 블랙코미디인 것이다. 알란의 삶을 유쾌하게 그리면서도 이런 방식의 삶은 영화 속에서나, 온갖 우연의 중첩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 뿐이라는 진지한 선언처럼 읽히기도 한다.

영화 속 알란은 생각하지 않고도 잘 살았으나 누구도 그와 같은 태도로 그와 같이 살지는 못할 것이기에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주문처럼 말이다.

폴 발레리는 말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나는 이것이야말로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감춰진 주제라고 생각한다.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영화가난다’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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