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리뷰] 뻔한 게 매력, 김종관 감독의 사소한 단편소설 ‘더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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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공간, 카페. 그 곳에선 다양한 군상의 삶이 묻어나온다. 요란하다면 요란하고, 잔잔하다면 잔잔한 그 곳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는 드물다. 김종관 감독은 기어코 그 낯선 경험을 스크린에 수놓아, 사소한 듯 하나 생소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듣게 만들었다.

‘더 테이블’은 하나의 카페, 하나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하루 동안 머물다 간 네 개의 인연을 통해 사랑과 관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옴니버스 식의 작품이다. ‘최악의 하루’에서 쉼 없이 이동하는 하루를 그렸던 김 감독이 이번엔 고정된 공간을 이용해 하루를 채운다. 단면적인 공간에서, 다채로운 인물들의 단면적인 삶을 관찰하는 일은 생각보다 꽤나 흥미롭다.

한적한 골목, 낡은 의상실 옆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카페. 목제 테이블 위를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손님을 맞이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카페 주인만이 그 곳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잔잔한 곳에, 네 인연의 삶이 물밀 듯이 밀려와 넘실거리는 파동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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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인연. 지난 시간만큼이나 벌어진 삶과 생각, 헤어진 연인 유진&창석
네 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유머러스하다.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로 불리는 유진(정유미 분)과 창석(정준원 분)은 이별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얼굴을 마주한다. 유진은 한때 함께 품었던 추억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창석의 시선은 틀어졌다. 옛 연인이 아닌, 스타를 향한 호기심으로 변모했고 맥없이 이어가는 대화에 유진은 씁쓸하다. 그들은 그렇게 평행선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우스꽝스럽게 헤어진다.

두 번째 인연. 하룻밤이 발전시킨 감정, 필요한 건 용기와 솔직함. 경진&민호
가벼운 하룻밤 사랑으로 시작했으나 끝끝내 놓지 못한 감정이 두 사람을 휘감는다. 민호(전성우 분)는 경진(정은채 분)과 짧은 사랑을 나눈 후 돌연, 네 달간의 여행을 떠난다. 그런 민호가 경진은 원망스럽기만 하다. 민호 역시 오랜 시간 동안 경진을 추억했지만 섣불리 진심을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시작이 남달랐던 만큼 서로를 향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 끝자락에 선 대화는 위태롭다. 미련하게 종결 지어질 무렵, 두 사람은 마침내 관계의 중심 앞에서 마주한다.

세 번째 인연. 거짓으로 교감을 이루는 방법, 결혼 사기로 만난 은희&숙자
은희(한예리 분)와 숙자(김혜옥 분)는 결혼 사기를 치는 인물이다. 가짜 모녀로 만난 두 사람은 거짓된 형식 속에서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펼친다. 숙자는 은희에게서 잃은 딸의 모습을 읽게 되고, 은희는 죽은 엄마를 떠올린다. 끝까지 거짓이라는 외피는 놓지 않지만, 그 안에서 그들만이 아는 진솔한 교감을 나누기에 이른다.

네 번째 인연. “마음 가는 길과 사람 가는 길이 왜 다를까” 전 연인, 혜경&운철
결혼을 앞두고 있는 혜경(임수정 분)은 헤어진 남자친구, 운철(연우진 분)과 만난다. 결혼이라는 크나큰 결심 전에, 대수롭지 않은 척 그를 붙잡기 위함이다. 혜경은 운철이 헤어지라면 헤어지겠다는 묘수까지 꺼내들지만 운철은 버텨낸다. 한없이 흔들리고 애틋한 마음이 솟구침에도 불구, 운철은 끝끝내 뿌리친다.

거짓을 두른 인물들의 표정 속에 감춘 진솔함은 사실, 더할 나위 없이 투명하다. 그러나 노골적이지 않다. 이는 색감, 음악, 장소, 시간, 이 모든 것을 소품으로 활용한 덕이다. ‘최악의 하루’에서 일관되게 펼쳤던 싱그러운 녹음 대신, ‘더 테이블’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온도를 높여갔다. 어딘가 알싸하면서도 푸른빛이 가득했던 오전부터 뜨거운 주황빛이 흘러나오는 밤까지, 조명을 이용한 자연스러운 변주는 감정의 밀도까지 파악하는 데에 탁월하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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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더 테이블’에는 다채로운 화면 전환도, 머리를 띵하게 울릴 만한 내러티브도, 숨 가쁜 장소 이동도 없고 어느 것 하나 특별한 것 없지만 그래서 다르다. 오롯이 배우들의 연기만이 곧, 개연성이다.

아름답게, 미모의 최고치를 끌어내기로 유명한 비주얼리스트답게 김종관 감독은 네 명의 여성배우의 얼굴을 구석구석 영리하게 활용한다. 화면 속 네 배우의 모습은 황홀할 지경이다. 짙은 캐릭터성보다 자연스러움이 묻어나오는 연기에 정평이 난 정유미는 짧은 순간에도 비릿한 기분을 훌륭히 표출한다. 미세하게 끌어올리는 입꼬리와 냉소를 담은 미소가 돋보인다.

유달리 정은채를 향해서 빅 클로즈업 숏을 십분 활용하는데, 차분하고 작은 움직임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데에 능숙한 그녀에게 제격이다. 조금도 놓치지 않고 예민하게 잡아낸다. 임수정 역시 마찬가지로 사소한 찡그림까지 놓치지 않고 화면 가득 옮겨 놓는 데에 성공한다. 한예리는 표정 대신 목소리를 무기로 삼았다. 한결같이 미소를 그리고 있는 표정과 달리 은희의 감정에 따라 목소리 떨림의 정도는 달라지고, 톤의 높낮이가 미세하게 변한다.

통속적이고 뻔한 이야기로 버무려진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상의 세세한 부분에 온전히 집중하며 김종관 감독의 시도는 산뜻하다. 또한 70분이라는 시간으로 이야기는 압축되어있지만 결코 밀도는 낮지 않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이어지는 대화와 인물들의 표정이 감정을 제대로 서술해낸 덕이다. 무엇보다 여성 배우를 주축으로 끌어올려 남성 배우가 이를 받쳐주는 과감한 구조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다. 24일 개봉 예정.


/9009055_star@fnnews.com fn스타 이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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