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보다 수비가 편하다"... 유리몸 탈출 선언
"홈런 개수? 생각 안 해... 숫자보다 생존이 먼저"
최형우 없는 첫 시즌, "빨리 익숙해져야"
김포공항에서 만난 나성범.사진=전상일 기자
[김포공항 = 전상일 기자] 25일 김포공항.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나성범(KIA)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지 어느덧 5년 차. 하지만 공항을 떠나는 그의 등 뒤에는 '150억의 사나이'라는 찬사 대신, '부상 병동'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건 단 하나였다. "과연 올해는 풀타임을 뛸 수 있는가."
이를 의식한 듯 나성범은 인터뷰 내내 '변화'와 '건강'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날 인터뷰의 백미는 따로 있었다. 바로 수비에 대한 그의 확고한 의지였다.
최형우가 떠나고, 주전 유격수 박찬호마저 이적했다. 팀의 중심이 휑하니 뚫린 상황. 나성범의 공격력을 극대화하고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풀타임 지명타자' 전환이 유력하게 거론되던 터였다.
하지만 나성범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지명타자보다는 수비 나가는 게 훨씬 익숙하고 편하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수비 나갈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게 내 목표"라고 못 박았다.
이는 단순한 선호도의 문제가 아니다. 수비를 소화한다는 건 급가속과 급제동, 슬라이딩을 견딜 수 있는 '하체'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지난 3년간 햄스트링과 종아리 부상으로 고생했던 그가 수비를 고집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번 시즌 몸 상태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루틴도 바꿨다. "매년 부상 방지를 위해 노력했지만 계속 다쳤다. 그래서 올해는 필라테스를 시작했고, 운동 방식도 완전히 다르게 가져갔다"고 밝혔다. 기존의 방식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백지상태에서 몸을 다시 만든 것이다.
김포공항에서 만난 나성범.사진=전상일 기자
거포들이 빠져나간 타선에서 장타에 대한 부담감은 없을까. 나성범은 뜻밖에도 '숫자'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았다.
그는 "시즌을 치르면서 홈런을 쳐야겠다고 생각하고 타석에 들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몇 개의 홈런을 칠지는 모르겠다. 홈런이 적더라도 중요한 순간 타점을 올리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화려한 홈런왕 경쟁보다는, 팀 승리에 직결되는 '영양가'를 챙기겠다는 의미다. 이는 지난 시즌 8위로 추락한 팀 성적과 자신의 부진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답변으로 풀이된다. 2025년 타율 0.268의 굴욕을 씻기 위해서는 개인 기록보다 팀의 승리가 절실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정신적 지주' 최형우의 부재에 대해서도 그는 냉정하리만치 담담했다. "매년 있는 일이다. 선수는 들어오고 빠진다. 빨리 익숙해져야 한다"는 그의 답변에서는 베테랑의 냉철함이 묻어났다.
뉴시스
하지만 그 담담함 이면에는 엄청난 책임감이 도사리고 있다. 이제 KIA 더그아웃에 그가 기댈 곳은 없다. 후배들을 이끌고, 성적을 내고,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가장'의 역할이 오롯이 그의 몫이 됐다.
"작년엔 솔직히 좋은 시즌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도 힘들었다"고 고백한 나성범. 그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잊을 건 잊고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나성범은 이제 일본의 외딴곳에서 다시 땀을 흘린다. "수비를 하겠다"는 그의 고집이 '객기'가 아닌 '증명'이 될 수 있을까. KIA의 2026년 명운은 나성범의 두 다리에 달려있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