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단순히 금메달을 딴 것이 아니다. 라이벌들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트라우마를 심어줬다. 세계 배드민턴계가 '안세영 시대'의 독주를 인정하고 있다. 그것도 가장 강력한 경쟁자들의 입을 통해서다.
안세영(삼성생명)이 2025 BWF 월드투어 파이널스를 제패하며 세계 최강의 입지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안세영의 목에 걸린 금메달보다, 네트 건너편 라이벌들이 보인 '반응'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존경을 넘어선 '경외감'과 '무력감'을 토로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결승전 직후 믹스트존에서 나왔다. 세계랭킹 2위이자 안방 중국의 응원을 등에 업었던 왕즈이는 경기 후 펑펑 눈물을 쏟았다. BWF 관계자조차 "왕즈이가 저렇게 우는 건 처음 본다"고 놀랄 정도였다.
이 눈물의 의미는 단순한 패배의 슬픔이 아니었다. '벽을 만난 절망감'이었다. 왕즈이는 올해 안세영을 상대로 8번 싸워 8번 모두 졌다. 지독한 '공안증(안세영 공포증)'이다.
왕즈이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가 드러난다. 그는 "안세영은 전 세계 선수들에게 분석당하고 연구된다. 하지만 코트에 설 때마다 그녀는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털어놨다. 죽어라 분석해서 나오면, 안세영은 이미 또다시 진화해 있다는 뜻이다. 왕즈이는 "안정감, 스피드, 경기 운영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한 수 위"라며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했다.
한때 안세영의 '천적'으로 불렸던 야마구치 아카네(일본)의 증언은 더 구체적이다. 과거 안세영과 야마구치의 경기는 '창과 방패'가 아닌 '방패와 방패'의 대결로 1시간을 훌쩍 넘기는 진흙탕 승부가 기본이었다.
하지만 이번 준결승은 단 38분 만에 끝났다. 야마구치는 그 원인을 안세영의 '공격 본능 장착'에서 찾았다.
야마구치는 "예전 안세영은 수비가 강한 선수였는데, 이제는 공격에도 힘이 붙었다. 랠리를 버티기가 훨씬 더 힘들어졌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안세영은 올해 대부분의 경기를 40분대에 끝내고 있다. 지독한 수비로 상대의 진을 빼놓던 그가, 이제는 날카로운 창까지 휘두르며 상대를 '박살' 내고 있다는 증거다.
결국 라이벌들의 말을 종합하면 결론은 하나다. 안세영은 멈춰있는 챔피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비가 좋다는 평가를 받으면 공격을 보완하고, 체력을 분석당하면 경기 운영 능력을 바꾼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골치가 아프다"는 야마구치의 말은 현재 세계 여자 단식 선수들의 공통된 비명이다.
왕즈이의 눈물과 야마구치의 탄식. 2025년 겨울, 안세영은 전 세계 배드민턴 선수들에게 '모두의 롤모델'이자, 동시에 가장 만나기 싫은 '가혹한 재앙'이 되었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