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타이틀을 모으는 게 내 취미이자 원동력이다."
지난해 배드민턴 라켓 하나로 전 세계 상금 14억 5천만 원을 쓸어 담으며 '영 앤 리치'의 정석을 보여준 안세영(삼성생명). 이미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그녀가 내뱉은 2026년 새해 목표는 '무패(無敗)'였다. 1년 내내 단 한 번도 지지 않겠다는, 스포츠 선수로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미친 선전포고'는 결국 현실이 됐다.
안세영은 11일(한국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2026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월드투어 슈퍼 1000 말레이시아 오픈 여자 단식 결승에서 중국의 왕즈이를 세트 스코어 2-0(21-15, 24-22)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안세영은 이 대회 3연패의 금자탑을 쌓음과 동시에, 지난해부터 이어진 5개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특히 왕즈이를 상대로 9전 전승을 거두며 지독한 '천적' 관계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이번 대회는 시작부터 안세영의 '공포'가 지배했다. 안세영이 "올해 목표는 전승"이라고 선언하자, 세계 최강을 자부하던 중국의 간판스타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줄줄이 짐을 쌌다.
8강 상대였던 세계 5위 한웨가 감기 몸살을 이유로 기권했고, 4강에서 만날 예정이었던 '숙적' 천위페이(세계 4위)마저 경기 12시간을 앞두고 백기를 들었다.
중국 언론조차 "안세영에게 우승컵을 갖다 바치는 꼴"이라며 자국 선수들의 '기권 러시'를 비판할 정도였다. 안세영은 4강전에서 라켓 한번 휘두르지 않고 결승에 무혈입성했다.
유일하게 안세영에게 도전장을 내민 건 결승 상대 왕즈이였다. 동료들이 모두 기권한 상황에서 왕즈이는 처절하게 저항했다.
체력을 비축한 안세영은 1세트부터 가벼운 몸놀림을 보였다. 특유의 그물망 수비에 날카로운 대각선 공격을 섞어 21-15로 가볍게 기선을 제압했다. 큰 위기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2세트부터 왕즈이의 거센 반격이 시작됐다. 벼랑 끝에 몰린 왕즈이는 초반부터 3-0으로 앞서나가며 안세영을 압박했다. 특히 10-8 접전 상황에서 왕즈이는 안세영을 코트 구석으로 몰아넣는 현란한 하이클리어와 강력한 스매싱을 앞세워 연속 득점에 성공했다.
점수 차가 순식간에 9-17까지 벌어졌다. 안세영의 발이 무거워 보였고, 흐름은 완전히 왕즈이에게 넘어간 듯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안세영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무려 5연속 득점을 하며 18-19까지 왕즈이를 추격했다. 왕즈이가 고작 1점을 따는 동안 무려 8점을 얻어내며 흐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돌려놨다. 특히 18-19 상황에서 왕즈이가 치명적인 스매싱 실수를 범하며 경기는 19-19가 됐다.
결국 20-20에서의 마지막 듀스 승부. 결국 안세영은 23-22로 승부를 뒤집어냈다. 그리고 마지막 스매싱이 코트에 떨어지며 안세영은 최종 승리를 만끽했다.
상대의 체력이 떨어지기를 기다린 안세영은 2세트 중반부터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왕즈이의 회심의 공격을 모두 받아내는 '좀비 수비'가 되살아났고, 당황한 왕즈이의 범실이 쏟아졌다.
결국 안세영은 2세트를 가져오며 2026년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패배를 삭제하겠다던 안세영의 '욕심'은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중국 선수들이 알아서 패배를 선택해 사라지거나, 코트 위에서 처절하게 무릎 꿇거나 둘 중 하나였다.
2026년, 안세영의 시대는 이제 막 첫 페이지를 넘겼을 뿐이다. 전 세계 배드민턴계가 그녀의 '무패 행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