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얼음판 위에 기름이라도 칠해놓은 것 같았다. 세계 최정상급 스케이터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다.
올림픽의 여신은 모든 우승 후보들을 외면하고 빈 왕좌를 마련해 두었다.
하지만 한국 피겨의 간판 차준환(서울시청)은 그 빈자리에 앉지 못했다. 그래서 너무 아쉽다.
역대 최고 성적인 4위라는 위업을 달성하고도, 웃을 수 없었다. 아니, 땅을 치고 통곡해도 모자랄 만큼 억울하고 분한 밤이었다.
14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차준환은 총점 273.92점을 기록, 전체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2018 평창 15위, 2022 베이징 5위에 이은 한국 남자 피겨 사상 최고 성적 경신이다.
하지만 ‘박수’만 보내기엔 상황이 너무나 기가 막혔다. 이날 프리스케이팅은 '난장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몰락의 연속이었다. 압도적인 우승 후보로 꼽히던 세계랭킹 1위 일리야 말리닌(미국)이 무너졌다. '쿼드 신'이라 불리던 그는 쿼드러플 악셀을 포함해 무려 4개의 점프를 놓치는 최악의 연기를 펼쳤다. 규제가 풀린 '백플립'까지 시도하며 발버둥 쳤지만, 결과는 처참한 8위(264.49점)였다.
경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가기야마 유마는 3개의 4회전 점프를 모두 실패하며 자멸했고, 프랑스의 아당 샤오잉파 역시 빙판 위에 나뒹굴었다. 상위권 선수들이 줄줄이 무너지며 금메달 점수대가 뚝 떨어졌다. 쇼트 5위에 그쳤던 카자흐스탄의 미하일 샤이도로프가 291.58점으로 '어부지리' 금메달을 가져갈 정도였다.
좋은 연기만 펼친다면, 차준환이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는 기적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게 만든 건 단 한 번의 실수였다.
'광인을 위한 발라드'에 맞춰 연기를 시작한 차준환은 첫 점프인 쿼드러플 살코를 완벽하게 뛰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두 번째 과제인 '쿼드러플 토루프'가 발목을 잡았다. 착지 과정에서 크게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실수 하나가 치명타였다. 수행점수(GOE) 4.75점이 깎였고, 감점 1점까지 받았다. 단순히 점수만 잃은 게 아니었다. 흐름이 끊기며 프로그램 전체의 완성도에 생채기가 났다.
결과론이지만, 만약 이 점프를 버텨냈다면 어땠을까. 동메달을 딴 사토 슌(일본·274.90점)과의 점수 차는 고작 '0.98점'. 1점도 안 되는 차이였다.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동메달은 확보였고, 클린 연기 시 쏟아질 예술점수(PCS) 가산점까지 고려하면 가기야마(280.06점)를 제치고 은메달, 아니 경쟁자들이 전멸한 상황에서 금메달까지도 넘볼 수 있었던 흐름이었다.
차준환은 넘어진 직후 벌떡 일어나 남은 연기를 투혼으로 마무리했다. 트리플 악셀 등 나머지 점프들을 흔들림 없이 소화하며 클래스를 증명했다. 경기가 끝난 후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한동안 은반을 떠나지 못했다. 본인 스스로도 직감했을 것이다. 오늘이 생애 다시 오지 않을 '금메달의 기회'였다는 것을.
한국 남자 피겨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톱4'. 분명 위대한 성과다. 하지만 밀라노의 밤은 너무나 잔인했다. 경쟁자들의 자멸 속에 활짝 열려있던 '금빛 문' 앞에서 미끄러진 그 한 번의 점프가, 차준환과 지켜보는 국민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통한'이 되고 말았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