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결과는 패배였지만, 그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장충체육관을 가득 메운 우리카드 팬들의 눈시울은 붉게 달아올랐다. 소설로 써도 욕먹을 법한 현대캐피탈의 2경기 연속 리버스 스윕. 그 잔인한 드라마의 희생양이 되었음에도, 우리카드가 올 시즌 보여준 ‘미친 여정’은 배구 역사에 영원히 박제될 명승부였다.
박철우 감독 대행이 이끄는 우리카드는 29일 현대캐피탈과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세트스코어 2-3으로 무릎을 꿇었다. 4세트 41-39라는, V리그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혈투 끝에 잡은 패배였기에 아픔은 더 컸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 배구계의 시선은 승자가 아닌 '패장' 박철우에게로 향했다.
불과 몇 달 전을 돌이켜보자. 3라운드까지 단 6승에 그치며 6위 언저리를 맴돌던 우리카드는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은 팀이었다. 그때 지휘봉을 잡은 이가 바로 박철우였다. 지도자 경력 1년도 채 되지 않은 초보 대행에게 기대를 거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기적을 썼다. 부임 후 18경기에서 14승을 쓸어 담으며 승률 78%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찍었다. 특히 '원정 9연승'이라는 독보적인 기록은 그가 단순한 대행이 아닌, 준비된 전략가임을 증명했다. 장인 신치용 전 감독의 '우승 DNA'를 물려받은 '배신의 사위'라는 별명이 무색할 만큼, 그는 자신만의 색깔로 우리카드를 완전히 다른 팀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날 경기 후 박 대행은 모든 패배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 "내 책임이다. 선수들은 너무나 잘 싸워줬고, 이런 선수들과 함께해 행복했다"는 그의 말에는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4세트 대역전패의 순간, 코트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내가 해결했으면 됐는데"라고 자책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권위적인 감독이 아닌, 동생들을 아끼는 큰형님의 리더십을 보았다.
그는 선수들의 라커룸 표정 하나까지 살피며 세밀하게 팀을 다독였다. '미친 선수'가 나오길 바란다며 세터 한태준에게 무한 신뢰를 보냈고, 신인 손유민을 과감히 투입하는 승부수도 던졌다. 비록 챔피언 결정전 문턱에서 멈춰 섰지만, 박철우가 심어놓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은 우리카드라는 팀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제 우리카드 구단에게 묻고 싶다. 이만한 성과와 리더십, 그리고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지도자를 두고 고민할 이유가 있는가.
박철우 대행은 이미 대행이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떼어냈다. 만약 우리카드가 그를 잡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배구계의 미스터리가 될 것이다.
"다음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담담하게 인터뷰를 마친 박철우. 하지만 우리는 안다. 올 봄, 장충의 코트 위로 쏟아졌던 그 뜨거운 눈물과 함성이 새로운 '박철우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축포였다는 것을.
우리카드의 봄은 여기서 멈췄지만, 지도자 박철우의 배구는 이제 막 첫 페이지를 넘겼을 뿐이다.
박철우와 함께한 이 미친 여정은 패배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였고, 우리카드 팬들에게는 생애 가장 뜨거웠던 봄날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