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11월의 차가운 도쿄 바람 속, 150명의 야구 천재들이 모인 트라이아웃 현장. 긴장한 투수들이 연신 공을 패대기치며 고개를 숙일 때, 컨벤션고 출신의 한 무명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한국 드래프트에서 외면받았던 '22이닝짜리 투수' 오정훈(19)이었다. 오정훈의 트라이아웃을 주관한 채수연 스포츠멘탈코치의 입술도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모두가 굳어있던 그 순간, 그는 싱긋 웃으며 라이너성 강속구를 포수 미트에 꽂아 넣었다. 무려 3차에 걸친 테스트끝에 이바라키 아스트로 플래닛츠가 단 2명만을 낙점한 그 바늘구멍을 뚫는 순간이었다.
◆ KBO 미지명 설움 딛고… 트라이아웃 150명 중 단 2명, 좁은 문 뚫었다
오정훈은 투수로서의 이력이 길지 않다. 중학교 때까지 유격수를 보다가 고교 2학년 중반에 투수로 전향했다. 투수로서의 완성도는 당연히 높지 않았고, 3년 동안 소화한 이닝도 일천했다. 2025년 컨벤션고 3학년 재학시절 11경기 2승 2패, 22이닝 소화에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했다. 공식 최고 구속 역시 143km/h 남짓. 구속과 당장의 성적이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 되는 국내 스카우트 시장에서 그가 설 자리는 좁았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는 대신 바다 건너로 시선을 돌렸다. 채수연 코치의 권유였다. 채 코치는 일본에서 유학 경험이 있었고, 오정훈의 멘탈코칭을 맡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일본 트라이아웃을 소개했고, KBO 드래프트 직후인 11월, 일본 9개 독립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선착순 150명만 참가할 수 있는 치열한 무대였다. 1단계 기초 체력 및 송구 테스트, 2단계 불펜 피칭, 3단계 라이브 피칭으로 이어지는 깐깐한 검증 과정 속에서 오정훈은 특유의 '강심장'을 발휘했다.
"다른 투수들이 긴장한 것이 보이더라고요. 저는 고등학교 연습 경기라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던졌습니다. 제 장점이 소위 쫄지 않는 것이거든요"라고 그는 당시를 회고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50명의 지원자 중 일본 루트인 BC리그의 강팀 '이바라키 아스트로 플래닛츠'의 부름을 받은 선수는 오정훈을 포함해 단 2명뿐이었다.
모두가 "너 거기 어떻게 들어갔냐"라고 놀라워했다. 일본 독립리그는 낯선 곳이 아니다. 삼성의 미야지 유라, SSG의 긴지로 등 아시아쿼터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입성하면서 KBO 팬들에게도 이미 익숙한 이름이 됐다.
◆ 일본 독립리그는 어떤 곳?? 루트인 BC리그의 강팀 이바라키는 어떤 팀?
일본 독립리그는 프로의 문턱에서 좌절한 유망주들이 야구를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촘촘한 '패자부활전 마운드'다. 전국 40여 개 구단 중 오정훈이 진출한 '루트인 BC리그'는 도쿄 인근 9개 구단이 경쟁하는 최상위 수준의 리그로, 연간 70~80경기를 소화한다.
도쿄를 둘러싸고 있는 지바, 사이타마, 군마, 이바라키 등 도쿄 인근 주변 지역을 베이스로 하는 총 9개 구단으로 구성된 리그로, 한국으로 치면 '경기도 리그' 같은 개념이며, 독립리그 중에서도 상당히 수준이 높고 힘이 있는 리그로 평가받는다.
여기에 NPB(일본프로야구) 2군 등과의 교류전 및 연습 경기까지 포함하면 한 시즌에 총 80경기 정도를 소화한다.
특히 강팀으로 꼽히는 '이바라키 아스트로 플래닛츠'는 숙식과 장비를 전폭 지원하며, 매년 NPB(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로 선수를 정식 승격시키는 육성 시스템을 자랑한다. 작년에도 3위를 차지했다.
이바라키 구단의 육성 능력은 대만 출신의 내야수 양 보시앙(Yang Po-hsiang,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사례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고교 시절 3루수와 외야수를 겉돌던 그를 전격 유격수로 전향시켜, 2024년 NPB 정식 지명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한국 KBO 롯데 자이언츠로 간 외야수 조민영도 이 구단에서 2년간 활약한 바 있다.
사실, 일본 독립리그 중 돈을 내고 다니는 곳(오사카 쪽)과 달리, 이곳은 돈을 주는 진짜 프로 형태의 독립리그 형태다.
기본 계약금은 없으며, 캠프 기간 월 9만 엔, 4월 시즌 개막 후에는 월 10만 엔(약 100만 원 안팎)의 기본 연봉이 10개월 동안 지급된다. 승리 투수 등 경기 활약에 따라 월 최대 5만 엔의 인센티브가 추가되기도 한다. 금액 자체가 많지는 않지만 숙소, 교통비, 야구 장비(용품) 등은 구단에서 전액 지급하므로 선수는 순수 식비만 본인이 해결하면 되는 구조다.
◆ 숫자에 갇힌 韓 야구, '메커니즘과 가능성'에 주목한 日... "오정훈 클로저의 가능성 봤다"
오정훈의 이바라키행이 시사하는 바는 단순히 한 선수의 해외 진출 그 이상이다.
한국과 일본 야구가 유망주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당장 150km/h를 던질 수 있는 완성된 '구속'과 '숫자'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일본은 선수의 '메커니즘'과 장기적인 '성장 가능성'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실제로 이바라키 구단 관계자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오정훈을 지명한 이유에 대해 객관적이고 명확한 평가를 내놓았다.
이바라키 구단 측은 "아직 체격이 가늘어 트레이닝이 더 필요하지만, 좋은 투구 폼과 높은 커맨드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며 "이미 공을 다루는 감각을 갖추고 있어 피지컬 측면이 완성되었을 때 한 단계 크게 도약할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는 릴리프, 장기적으로는 팀의 클로저로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당장의 스피드보다 투구의 밸런스, 타자와 승부할 수 있는 커맨드를 우선시하고, 체격과 구속은 구단의 육성 시스템을 통해 2~3년에 걸쳐 만들어가겠다는 '기다림의 철학'이 깔려 있는 셈이다.
일본 야구는 한국과는 평가 기준이 다르다. 150km/h 이상의 구속을 중요시하는 것은 같지만, 그 바탕에 반드시 '기본적인 제구력'과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할 수 있는 '결정구'가 확실한지를 엄격하게 따진다. 또한, 단순히 체격이 크고 작음보다는 몸을 쓸 줄 아는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본이 오정훈을 높게 평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뛰어난 커맨드 능력과 스스로 공을 섬세하게 다룰 줄 아는 감각적인 운동 능력에 주목했다.
◆ 홀로서기 나선 19세 청년 "외로우면 엄마랑 영상통화 할래요... 최종 목표는 NPB 1군 마운드"
일본 독립리그의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다. 낯선 타국에서 통역도 없이 홀로 모든 것을 부딪쳐야 한다.
거기에 이곳도 엄연히 프로의 룰을 따른다. 도태되면 곧 퇴출이다. 어떻게든 NPB 무대로 기어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오정훈의 목소리에는 두려움보다 기대감이 가득했다.
구단의 '체중 증량' 지시를 받자마자 기차 안에서 삼각김밥 3개를 연달아 먹어 치울 정도로 독기를 품었다. 그의 롤모델은 야마모토 요시노부(투수로서)와 오타니 쇼헤이(인간으로서)다. 하지만 마운드 밖으로 내려오면 영락없는 열아홉 소년이다.
낯선 타국 땅에서 통역도 없이 마주할 외로움과 텃세를 어떻게 견디겠냐는 질문에 그는 싱긋 웃으며 "제가 외로움을 좀 타긴 하는데요, 엄마를 진짜 좋아하거든요. 맨날 밤마다 엄마랑 영상 통화 하면 다 털어낼 수 있어요"라고 답했다.
마운드 위에서는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긴장감 속에서도 배짱 있게 공을 뿌리고, 돌아서면 엄마 보고 싶다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소년. 이 지독한 독기와 순수한 열정의 묘한 공존이야말로 일본 야구가 오정훈이라는 원석에 매료된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 고교 야구의 새로운 길… 오정훈은 성공할 것인가? '육성'의 진정한 의미를 묻다
일본에는 150개가 넘는 사회인 야구팀과 40여 개의 독립리그 팀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있다.
선수가 야구를 포기하지 않고 기량을 꽃피울 수 있는 시스템과, 실패한 선수도 '세컨드 커리어'를 통해 사회의 일원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인프라가 탄탄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정훈의 일본 독립리그 진출은 프로의 좁은 문턱에서 좌절한 수많은 한국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에게 새로운 '루트'를 제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오정훈은 이제 낯선 타국에서 홀로서기에 나선다. 분명 장현석(다저스)이나 김성준(텍사스) 같은 화려한 해외 진출은 아니다. 하지만 오정훈은 흔들림이 없다. "첫 번째 목표는 구단에서 인정받는 것이고, 최종 목표는 반드시 NPB(일본프로야구) 1군 무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것"이라는 그의 당찬 포부가 한국 야구계를 뒤흔들 멋진 반전 드라마로 이어질 수 있을까.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